정조 2권, 즉위년( 1776 병신 / 청 건륭(乾隆) 41년) 8월 6일 을사 2번째기사

출처: 조선왕조실록(→해당기사 바로가기)

이응원(李應元)을 친히 국문하였다. 영남 유생 이응원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선세자(先世子)314) 의 휴휼(休恤)하여 오던 남은 자리로 조종(祖宗)의 간대(艱大)한 유업(遺業)을 이어받으셨으니, 영우원(永祐園)에 덕을 갚고 태묘(太廟)의 안에 효를 다하시는 것으로는 다만 이 허구 날조(虛構揑造)하였던 흉역(凶逆)을 엄격히 토벌하고, 망극(罔極)한 무함을 통쾌하게 씻어 내어 척강(陟降)하는 선령(先靈)을 위로해 드릴 뿐입니다. 이는 신(臣) 한 사람의 사사로운 말이 아니라 곧 온 나라의 공변된 의논인 것입니다.

흉역을 징토(懲討)하지 않으면 망극한 무함은 씻을 수가 없고 선왕의 영혼에 위로 드릴 길이 없으며 공변된 의논은 아래에 울분(鬱憤)이 쌓이게 되어 국가가 따라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국가가 위태롭게 된다면 비록 초야(草野)의 한사(寒士)라도 또한 어찌 홀로 편안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송나라 신하 주희(朱熹)가 말하기를, ‘국가의 위망(危亡)이 판단되는 일이라면 비록 초야에 묻힌 선비라 하더라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신은 종성(宗姓)입니다. 몸은 비록 초야에 있으나 의리로는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였으니, 그 정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않고 그 사체(事體)는 조정에 있는 신하나 차이가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게 되면 집안도 같이 망하게 되고 임금이 욕을 당하게 되면 자신도 또한 함께 욕을 받는 격이니, 그 위망에 관계되는 일을 어찌 눈물을 흘리면서 한번 진달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피눈물을 머금고 먼저 임오년의 지극히 원통하였던 것315) 을 말씀 드리고 잇따라 국조(國朝)의 무함받은 것을 논하여 위망에서 돌이켜 부지(扶持)하는 방도를 도모하겠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아! 애통합니다. 임오년의 사건은 전하께서 차마 들으실 수 없는 바이고 신하로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바인데, 신이 어찌 반드시 다시 말을 꺼내어 우리 전하의 마음을 슬프게 해 드리게 되었습니까? 만일 차마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참는다면 마침내 지나치게 참음으로써 크게 차마 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변고의 일이 있은 뒤로부터 조정 사이의 일은 신이 알지 못하겠습니다마는, 무릇 우리 팔역(八域)의 서민(庶民)들이 길거리에서 이야기하고 골목에서 의논하는 자가 부자간에는 모두 근심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을 가졌고 남녀간에는 모두 슬퍼하며 탄식하는 소리를 내면서도 밤낮으로 하늘에 빌면서 바라고 원하는 것은 거의 전하께서 오늘에 있어 참소하여 이간하던 간흉(奸凶)을 드러내어 주벌(誅伐)하고 선세자(先世子)를 무함당하였던 함정 속에서 빼내어 놓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은 지가 여러 달이 되었습니다만, 시골에서 귀를 기울여도 마침내 한 사람도 통쾌히 주벌되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민간(民間)에서 전일의 바라던 것은 대부분 허투(虛套)로 돌아갔으니, 낙심(落心)하고 손에 맥이 풀려져서 생업에 즐겁게 여겨서 일을 하려는 의욕마저 없어졌습니다. 이는 일신상(一身上)의 절급(切急)한 일이 아닌데도 이와 같은 데에 이르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진실로 천하의 대의(大義)는 하루도 잊을 수 없고 윤상(倫常)의 대강(大綱)은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아! 전하의 자리가 어떠한 자리입니까? 만약 국가에서 임오년의 변고가 없었다면 전하께서는 오늘날에 춘궁(春宮)316) 의 한 원량(元良)317) 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선세자(先世子)가 보위(寶位)를 받았을 것입니다. 무릇 우리 전하께서 효성스러운 생각으로 선친(先親)께서 마땅히 이어받았어야 할 자리를 이어받고서 선친이 이어받지 못한 연유를 생각하신다면, 그 통박(通迫)한 감회와 비색(悲塞)한 심정이 어찌 다만 우부(愚夫)·우부(愚婦)가 억울하게 여기는 마음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크게 처분하는 거조(擧措)를 볼 수가 없는 것은 특히 우선 지극히 통분스러운 사정(私情)을 억제하면서 준엄하게 발론하는 공의(公議)를 기다리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격절(激切)한 공의가 발론되기를 기다리고자 한다면 전일에 죄를 지은 무리가 스스로 의구심(疑懼心)을 품고서 번갈아 흉계(凶計)를 선동하게 되어서 국가가 위망되는 화가 따르게 될 것이니, 그 기미를 먼저 포착하여 재처(裁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은 초야에 묻힌 한사이니, 청컨대 초야의 공의를 가지고 전하를 위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우선 공의의 근본이 되는 바를 언급하여 원한을 신설(伸雪)시켜 주는 하나의 증거될 만한 안건을 만들겠습니다.

대개 신과 같은 마을에 사는 고 설서(說書) 신 권정침(權正忱)은 임오년의 변고를 당했을 때의 궁료(宮僚)입니다. 그 집에 당시의 《서연일기(書筵日記)》와 선제자께서 조목별로 문의한 수찰(手札)과 상소하여 변무(辨誣)하려는 초본(草本)이 있었는데, 이에서 바로 선세자의 온공 근신(溫恭謹愼)한 것이 또한 족히 공의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일기(日記)에 기재된 것은 4월 18일부터 5월 21일에 이르기까지 날마다 《역경(易經)》·《강목(綱目)》 두 책을 강독한 것이었고, 저 하순(下詢)한 여러 조항에 미쳐서는 요순(堯舜)·우탕(禹湯)이 서로 이어받은 도통(道統)과 염민(㾾閩)318) 의 여러 현인이 학문을 강론한 요지(要旨)에서부터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정공(丁公)319) 을 주참(誅斬)하고 옹치(雍齒)320) 를 후(侯)로 봉(封)하여 준 것과 부소(扶蘇)321) 가 죽임을 당한 것이 효(孝)가 된다고 하여 무릇 의심나고 어려운 곳에 대해 변론한 것들이 치밀하고 순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진실로 자질이 고상하고 식견이 명철한 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것이 있었겠습니까? 이는 모두가 변고를 만나기 전 한 달 내의 일이었는데, 나경언(羅景彦)의 일이 발생하기에 이르러서는 연석(筵席)을 베풀어 경의(經義)를 강론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권정침이 기록한 것을 본다면 세자의 현명하고 영리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삼가 선대왕께서 세자에게 치제(致祭)한 글을 보건대, ‘이제 13일 후로는 여러 신하와 위사(衛士)가 목도(目覩)한 바가 있는데, 어찌 감히 숨기겠느냐?’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무릇 여러 신하와 위사가 목도한 일이란 아직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저 참소하는 사람들은 백단(百端)으로 교묘하게 속이므로 비록 수서(手書)한 것이 진(晉)나라 사마휼(司馬遹)322) 과 같고 충갑(衷甲)323) 한 것이 당(唐)나라 이영(李瑛)324) 과 같더라도 오히려 믿지 못하는데, 더구나 이 밖에 사람이겠습니까? 당시에 나라의 떠도는 말로는 혹은 참소를 꾸미는 사람이 간특(奸慝)하고 사악한 짓을 만들어 선대왕에게 선동하여 의심하게 하는 자가 있었으며, 혹은 원래 흉악한 무리가 사기를 부리고 흉계로 농간하여 선세자에게 죄를 돌리려 하는 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신은 초야의 풍문(風聞)으로는 아직 그 일의 허실을 적실하게 알 수 없으나, 수많은 사람이 서로 전하는 것으로는 모두 선세자가 진실로 과오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경언이 저군(儲君)325) 을 형조(刑曹)에 정소(呈訴)한 것에 이르러서는 이는 천하 만고에 나라와 백성이 있어 온 뒤로는 듣지 못한 바입니다. 당일 형조의 신하로는 마땅히 그 사람을 주륙(誅戮)하고 그 글을 불태워 없애는 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도 이것을 천폐(天陛)에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화변(禍變)의 매얼(媒孼)을 만들어냈으니, 그 마음의 소재(所在)를 길가는 사람도 또한 아는 바입니다.

또 삼가 생각하건대 선세자께서 대리로 왕사(王事)를 행한 지가 14년이어서 조정에 가득한 진신(搢紳)이 세자의 정전에 북면(北面)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이는 다만 다음으로 나라를 이어받을 한 왕세자일 뿐만 아니라 곧 왕위에 오를 진정한 군상(君上)이었습니다. 그 죄가 있고 없고는 논할 것 없이 스스로 이는 우리의 군부(君父)가 되는데, 당일 변고를 당할 즈음에 공경(公卿) 대간(臺諫)이 수수 방관(袖手傍觀)하여 마치 월(越)나라 사람의 야윈 것을 진(秦)나라 사람이 보고 있듯 아무 상관없는 것처럼 함이 있었으니, 이것이 조금이나마 신자(臣子)의 분의가 있다고 이를 만하겠습니까? 가령 만일 천자(天子)의 초책(誚責)이 혹은 왕정(王庭)에 미친다 하더라도 대조(大朝)326) 소조(小朝)327) 에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무리는 또한 장차 선세자를 섬기던 것으로써 우리 전하를 섬길 것입니다. 이조년(李兆年)·김윤(金倫) 같은 이를 지금 세상에서 다시 찾아볼 수는 없으나, 외축(畏縮)되어 명령이나 받드는 것이 이능간(李凌幹)·권한공(權漢功)의 결과가 되지 않음이 없습니다. 비록 참으로 이런 일이 있지는 아니하더라도 생각이 이에 이르니, 어찌 크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전하께서 3월에 하교한 뒤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비로소 김상로(金尙魯)가 원흉(元兇)이 된다는 것을 알았고, 전하께서 5월에 하교한 뒤로부터 나라 사람들이 또 문녀(文女)328) 가 대악인(大惡人)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왕세자를 폐출(廢黜)시키는 것이 이 국가에 얼마나 큰 일인데 또 더구나 이러한 변고에서 더 나아가 우리 선대왕의 성자(聖慈)하심으로서 현명(賢明)하신 우리 선세자를 처단(處斷)하여 이런 만고에 없는 큰 변고를 빚어 냄이 있었으니, 어찌 다만 한 적상(賊相)이나 반드시 온 조정에서 번갈아 선동하는 말이 선왕(先王)의 귀를 경동(驚動)시키기를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여 이러한 극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조정의 신하 중에서 이필(李泌)이 온 가족(家族)을 담보로 삼아 태자(太子)의 무죄를 보증하겠다고 울면서 아뢰듯이 하였다면329) 어찌 자애(慈愛)하신 성총(聖聰)을 돌리지 못하였겠으며, 또 혹은 내제(來濟)330) 가 천년(天年)을 다하게끔 하자고 간청하듯이 하였다면 어찌 일물(一物)331) 의 통박(痛迫)함이 있는 데에 이르렀겠습니까? 전정(殿庭)에 가득한 백료(百僚) 중에서 한 신하도 목숨을 내걸고 같이 죽으려는 거조가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9일 동안에 눈물을 흘리고 옷자락을 당기면서 간하는 한마디의 말도 없었으니, 그 심장(心腸)을 미루어 본다면 어찌 적상(賊相)이나 요녀와 같은 당(黨)인 것을 면하겠습니까?

신이 또 일찍이 권정침이 말한 것을 듣건대, 나경언이 대변(對辯)하던 밤을 당하여 세자께서 궐정(闕庭)에서 대죄(待罪)하던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궁료(宮僚)를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세자를 모함하는 것은 반드시 한 시정배(市井輩)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만약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엄히 신문할 것을 청한다면 거의 사주한 흉도(凶徒)를 찾아내어 내가 만고에 용납되기 어려운 죄명(罪名)을 씻겠으나 나를 위하여 주달(奏達)하는 자가 없는 데에야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하셨으니, 아! 분통합니다. 대저 우리 선세자께서 무고(無辜)한 가운데 위협을 받아 애절하게 바라는 바는 시중(市中)의 서민(庶民)을 한 번 국문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데도 또한 이르지 못했으니 천노(天怒)가 바야흐로 엄중하여 스스로 변명할 길이 없었고 뜰에 가득한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침묵하여 신백(伸白)하는 사람이 없어, 급작스레 휘령전(徽寧殿)의 변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늘에 사무치는 지극한 원한과 남모르게 격분하는 울결(鬱結)이 15년의 오랜 세월에 이르렀으니, 그사이에 장마나 가뭄으로 흉년이 거듭 이르고, 해와 달과 별이 궤도에서 어긋나게 되었던 것이 상천(上天)에서 세자를 위해 발로(發露)시킨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역당을 골라내어 다스리고 어버이의 원한을 드러내어 밝히는 것은 곧 전하께서 처음으로 정사를 하시는 데에 제일의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신료(臣僚)가 한 사람도 진달(陳達)하는 말이 없었고, 조정에 있는 자는 한갓 죽어 백골이 된 윤선거(尹宣擧)·윤증(尹拯)의 일에 급급하고, 초야에 있는 자는 거의가 황묘(皇廟)에 대한 실례(失禮)로써 소요(騷擾)를 피우면서 임오년의 일은 서로가 잊을 지경에 방치하고 있습니다. 아! 신은 모르겠습니다만 전하의 조정 신하가 전하께서 임오년의 지극히 원통하였던 일을 잊었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아니면 선세자께서 변고를 당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오늘에 있어 족히 논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장차 배사(背師)한 윤증(尹拯)의 나쁜 짓이 세자를 무함한 흉추(凶醜)보다 심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또는 장차 한쪽편 사람의 사감(私憾)을 통쾌히 씻는 것이 우리 전하께서 어버이 원수를 토복(討復)하는 것보다 급하다고 여기는 것입니까?

혹자는 또 말하기를, ‘세자께서 무함받은 것을 변명하려고 하면 선왕의 처분에 핍박되는 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는 크게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옛날 중종조(中宗朝) 때 조광조(趙光祖)와 여러 신하가 무함을 받고 원통하게 죽은 화변(禍變)이 있었는데 인종 대왕(仁宗大王)이 그 원통함을 씻어 주고 그 관직(官職)을 회복시켜 준 일이 있었으나 선조(先朝)에 핍박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 명종조(明宗朝) 때에 이언적(李彦迪)과 여러 신하가 또한 원통한 화를 입었는데, 선조 대왕(宣祖大王)은 도신(道臣)이 한 번 아룀으로 인하여 그 죄를 통쾌히 씻어 준 일이 있었으나 또한 선조의 일로써 혐의로 삼지 않았습니다. 신하에 대한 일에 있어서도 오히려 그러하였는데, 더구나 어버이에게 있어서 이겠습니까? 지금의 논하는 자는 의당 임오년의 일이 원통한가 원통하지 않은가를 논해야지 처분(處分)의 핍박되고 핍박되지 않은가를 논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진실로 지극히 원통한 일을 위하여 신설(伸雪)해 줄 일이라면 비록 혹 핍박된 점이 있어도 그만둘 수 없는데, 더구나 먼저 무함받은 것을 통쾌하게 분변하고 흉역을 골라 베어 없애어 선대왕의 처분이 이에 이르렀던 것은 실로 이 무리들의 주장(譸張)332) 한 것에 연유한 것이요 자모(慈母)의 투저(投杼)333) 에는 손상됨이 없다는 것을 보이신다면 또한 선대왕의 입장을 위하는 바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것으로써 선대왕의 영전(靈殿)에 밝게 고하여 거의 전일의 원통한 형상을 살피시고 뒤늦게나마 밝혀진 것을 깊이 불쌍하게 여겨 주신다면 비록 어두운 지하에서나마 능히 부자간의 즐거움을 이루는 것이 곧 처음과 같이 회복될 것이니, 그러면 선대왕께서도 또한 반드시 이 거조를 기쁘게 여기시고 당시에 전천추(田千秋)334) 가 없었던 일을 한탄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정이환(鄭履煥)이 거론한 봉조하(奉朝賀) 신 홍봉한(洪鳳漢)에 이르러서는 이미 변고가 있을 때의 수상(首相)으로서 간쟁(諫爭)하여 만류한 바가 없었으니, 그 죄가 진실로 말하지 않은 여러 신하들보다 큼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자궁(慈宮)의 부친(父親)이 되었으니, 만약 모의를 조성한 수범(首犯)이 아니라면 은혜를 온전히 하여 어버이를 위로하게 하는 것도 혹은 형편에 따라 재처(裁處)하는 한 방도가 될 것입니다마는, 어떻게 이 한 사람의 구애(拘碍)로 인하여 적신(賊臣) 강충(江充)335) 을 멸족(滅族)하고 글을 불태우는 등의 그만둘 수 없는 큰 거조를 늦출 수가 있겠습니까?

아! 백세(百世)는 앞에 있고 천세(千歲)는 뒤에 있어서 만고의 강상(綱常)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니, 후세의 공의(公議)가 더욱 두렵습니다. 바로 오늘날에 주토(誅討)의 법을 밝게 바로잡아 유울(幽鬱)한 원한을 말끔히 씻게한다면 죄명(罪名)을 구성(構成)한 원악(元惡)이 스스로 돌아갈 바가 있게 되고 허물도 없이 무함을 받은 자취는 스스로 드러나 밝혀져서 선대왕의 처분은 거의 자천(慈天)에 해롭지 않게 될 것이요, 선세자의 실정은 거의 천세 뒤에라도 명백해져서 우리 전하께서 양세(兩世)에 대해 효도를 다하였다는 연유도 또한 장차 영원히 다가오는 세대에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실로 그렇게 하지 못하신다면 비록 한 조정의 말못하는 신하에게는 엄폐하여 숨긴다 하더라도 사사로이 의논하는 팔방(八方)의 여론(輿論)을 능히 금할 것이며, 비록 능히 오늘의 어리석은 백성은 억압하여 막는다고 하나 직필(直筆)한 후세의 양사(良史)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이는 한 역당을 징토하는 데에 엄격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장차 삼세(三世)가 모두 무함을 받았다는 것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조속히 민심을 순종하고 밝게 건단(乾斷)336) 을 발휘하여 문녀(文女)와 김상로, 나경언과 문성국(文聖國) 등에 딸린 족속(族屬)과 그 밖에 정적(情跡)이 의심나는 자를 엄격히 국문하여 그 실정을 얻어내고 그 당여를 다스려서 선세자께서 한없이 원한을 품고 있는 지극한 아픔을 위로해 드리고 온 나라 사람의 목이 메이며 억울해 하는 여정(輿情)에 대응(對應)하는 것을 잠시도 늦출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태조 대왕(太祖大王)이 무함받은 일은 유계(兪棨)가 찬술(撰述)한 《여사제강(麗史提綱)》의 말단에 기재되어 있었는데 고 상신(相臣) 송시열(宋時烈)이 쓴 것에는 《별록(別錄)》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그 기록한 것은 주자(朱子)의 말을 빌린 것인데, ‘고려(高麗)는 30여 임금을 거쳐 권신(權臣)에게 찬탈(簒奪)당한 바가 되어서 성(姓)을 바꾸게 되었다.’고 하였고 이를 들어 공양왕(恭讓王)이 손위(遜位)한 아래에 실어 놓았습니다. 아! 공양왕을 대신하여 성을 바꾸고 일어난 분은 바로 우리 태조 대왕인데, 그가 이 말을 공양왕의 뒤에 특별히 쓴 것은 또한 무슨 마음이겠습니까? 장차 성조(聖祖)가 개창(開創)한 일을 권신이 나라를 찬탈한 것으로 돌리면서 스스로 만세(萬世)에 전하여 믿게끔 하려고 한 것입니까? 아!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오직 우리 태조 대왕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성스러움으로써 고려의 국운이 끝남을 만나 하늘의 내려 주었고 사람들이 돌아와서 한 나라를 세우게 되었던 것인데, 그가 반드시 주자가 다른 데서 말한 것을 빙자하여 권신이 나라를 찬탈하였다는 흉악한 무함으로써 덮어씌우는 것은 또한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송시열을 위하여 해명하는 자는 반드시 ‘주자의 말한 것이 이와 같다.’고 하였으나, 주자가 역책(易簀)337) 한 것이 성조가 개국(開國)하기 전 1백 92년에 있었으니, 주자가 어떻게 능히 미리 헤아려 보고 이런 말을 하였겠습니까?

고려 의종(毅宗) 때를 당하여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의 무리가 한 나라의 권세를 천단(擅斷)하여 그 임금을 추방했다가 살해하였는데 그 연세(年歲)를 상고하여 보면 바로 주자의 중년(中年)에 상치(相値)되니, 《주자어류(朱子語類)》에 운운(云云)한 것은 반드시 이 적(賊)의 난역(亂逆)을 지적한 것인데 소문이 사실과 어긋나서 착오의 단서가 있었던 것은 고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이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공양왕의 손위한 것이나 성조의 개국한 것에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신자(臣者)의 분의(分義)로써 말한다면 설령 주자가 명(明)나라 초기에 나서 직접 고려의 망한 것을 듣고 잘못 운운한 바가 있어 명조(明朝) 조훈(祖訓) 가운데 이른 바와 같다고 하더라도 무릇 우리 조종(祖宗)의 신자가 된 자는 또한 장차 숨기고 감히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또한 장차 진주(陳奏)하여 고치기를 청하였다면 반드시 신설(伸雪)한 뒤에야 그만두기를 장차 조종조(祖宗朝)에서 명조(明朝)에 하던 것과 같이 하여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이는 주자의 말이 애초에 고려가 망할 즈음에 간섭된 점이 없는 데 이겠습니까?

송시열은 평생에 늘 춘추 대의(春秋大義)를 가지고 문득 자기의 문득 자기의 담당을 삼으면서 이 또한 장차 주자가 잘못 들은 다른 말을 빌어서 스스로 곤월(袞鉞)의 성필(聖筆)338) 에 덧붙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송시열이 주자의 말을 인용하여 《별록(別錄)》을 삼은 것이 무릇 4조(條)인데, 3조는 모두 연류(年類)를 참고하여 주자의 생전(生前)에 덧붙이면서 유독 이 조항은 주자가 지척(指斥)한 정중부·이의방의 난(亂)에 쓰지 않고, 반드시 2백 년 아래 성조가 개국한 즈음에 실어 놓은 것은 어찌 용심(用心)한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까? 특히 이뿐 아니라 본 조항의 안에서 또한 그 머리 부분의 21자를 가져다가 연류를 참고하는 데에 삽입(揷入)하여 상조(上條)에 덧붙이면서 반드시 이 말을 끊어서 고려가 망한 뒤에 옮겨 실어 놓은 것은 과연 아무런 뜻이 없이 우연히 쓴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연조를 상고하여 보아도 아주 다르고 그 사실을 추구하여 보아도 아주 다르며, 《별록(別錄)》이란 표제(標題)는 이미 역사를 제작하는 범례(凡例)가 아닙니다. 자신이 신자가 되어 또 세상에 더없는 은우(恩遇)를 받았으면서 송시열이 이것을 써서 만세(萬世)에 폄손(貶損)함을 보인 것이 옳은 짓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까, 옳지 않은 짓이라고 하여야 하겠습니까? 아무 생각이 없어서 한 것이겠습니까, 생각이 있어서 한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또한 부득이해서 한 것이겠습니까? 노(盧)나라 소공(昭公)은 오맹자(吳孟子)339) 라고 한 잘못이 있었는데도 공자(孔子)가 예(禮)를 안다고 일컬었고, 송(宋)나라 태조(太祖)는 진교(陳橋)의 변(變)340) 이 있었으나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 쓰지 않았으니, 이는 그 임금의 〈잘못을〉 숨겨 주는 대의(大義)였습니다.

아! 성현(聖賢)이 임금을 위해서는 있었던 것도 숨겨서 허물을 덮어 주었는데 송시열은 임금을 위하여 없었던 일을 날조해서 폄손한 데에 부쳤으니, 이 또한 《춘추》의 대의를 알고 주자의 행사를 배운 자라 하겠습니까? 아! 송시열이 이미 이러한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세상을 피해 멀리 떠나거나 하늘의 이슬을 마시면서 스스로 고려 왕조의 후신(後臣) 노릇을 하고 우리 조정에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은 보이지 않고서, 이에 도리어 영화를 탐내어 성조(聖祖)의 신손(神孫)에게 공직(供職)하고, 성조의 묘정(廟庭)에서 북면(北面)을 하고서 배제(陪祭)한단 말입니까? 이 《별록(別錄)》이 있어 온 지가 이미 백년을 지났으니, 조정 신하나 유생(儒生)들이 모두 보았을 것입니다. 무릇 우리 동토(東土)에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부류(部類)는 누군들 우리 태조 대왕의 신민(臣民)이 아니겠습니까마는, 그들이 보고도 말하지 않는 것은 송시열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나라를 사랑하는 것이요, 그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은 송시열을 두려워하는 것보다는 나라를 두려워해서 그런 것입니다. 지금 신은 궁벽한 시골에서 늦게 태어나 근래에 와서 비로소 얻어 보았습니다. 이미 태조(太祖) 지파(支派)의 원손(遠孫)인 신분으로서 공사(公私)의 관한 울분이 더욱 격절하여 존엄(尊嚴)하신 자리에 번거롭고 외람됨을 피하지 않고 감히 이렇게 목욕(沐浴)하고 토죄(討罪)할 것을 청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조종(祖宗) 때의 명조(明朝)에 변무(辨誣)하던 지극한 심정을 생각하시고, 가까이는 선대왕께서 주인(朱璘)을 엄하게 토죄하던 성효(聖孝)를 체득하여 빨리 무서(誣書)를 훼손(毁損)시키고 통쾌히 현륙(顯戮)을 시행하셔서 위로 종묘(宗廟)에 고하고 아래로 신서(臣庶)에게 하유(下諭)하여 뒷사람들의 그릇된 의혹을 풀어 주고 성조(聖朝)에서 나라를 얻은 것이 정대하다는 것으로써 빛나게 하신다면, 이는 전하께서 태묘(太廟)에 효성을 다하시는 방도일 것입니다.

아! 임오년의 일을 온 조정 신료(臣僚)가 숨겨 오던 바인데 신이 지금 의논하였고, 송시열의 허물은 반국(半國)의 유신(儒紳)이 덮어 오던 바인데 신이 지금 말을 하였습니다. 시휘(時諱)341) 를 저촉하여 범하고 위태로운 말을 함부로 올렸으니, 진실로 어리석은 짓이 아니면 미치광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종의 신령(神靈)이 위에 계시고 경모궁(景慕宮)의 사당 모습이 밝게 빛났으니, 신이 어찌 감히 품은 마음을 잠자코 숨기면서 스스로 정직한 속마음을 저버릴 수 있겠습니까? 설령 말을 해서 시행됨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 죽는 곳에 나가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일국의 공의(公議)가 신으로 말미암아 진달(陳達)되고 우주에 뻗친 윤강(倫綱)이 신으로 말미암아 부식(扶植)되며, 국가의 위태로운 앙화가 신으로 말미암아 조금이라도 펴지게 된다면, 이 한 몸이 가루가 된다 하여도 분의상 마음에 달갑게 여기는 바입니다. 더구나 세자를 위하여 죽고 성조를 위하여 죽는다면 죽어도 또한 돌아가서 보답할 곳이 있게 되어서 의로운 귀신이 됨을 잃지 않을 것이니, 어찌 영광스럽지 않겠습니까?

신이 향곡(鄕曲)에 엎드려 있던 날에 흉역을 새로 주벌한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으나, 다만 사는 곳이 궁벽하고 멀어서 그 상세함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서울[輦轂]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삼가 7월 초 일의 윤음(綸音)을 보고서 군흉(群凶)의 궁천 극지(窮天極地)한 악이 있음을 천신(天神)과 지기(地祇)가 밝게 늘어서서 보는 데에 간특(奸慝)함이 밝게 드러났고 추악한 무리와 올빼미 같은 종자가 차례로 주륙(誅戮)되었다는 것을 삼가 알았습니다. 이는 진실로 종사(宗社)의 큰 경사요 온 나라 신민(臣民)이 서로 경하(慶賀)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흉악한 것을 제거하는 방도는 그 근본을 뽑아내고 그 근원을 막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신축년342) ·임인년343) 의 역적의 무리들을 능히 소탕(掃蕩)시키지 못함으로 해서 무신년344) 의 난을 점차 몰고 왔고, 을해년345) 의 변고를 빚어내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을 본다면, 또한 가히 전의 일을 징계삼아서 뒤의 일을 삼가는 것이 밝은 거울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 난역의 근원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과연 임오년의 무함을 만든 여당(餘黨)이 아니겠습니까? 이 무리가 비록 몹시 흉악하나 또한 심장(心腸)이 있을 것입니다. 무릇 그 집안은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여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았고 청현(淸顯)의 직품에 뛰어 올라 앉아서 부귀를 이루었으니, 이미 의지(意志)를 잃은 무리와는 다른데 무엇 때문에 나라에 원한을 품고 오히려 음흉(陰凶)한 화심(禍心)을 자행(恣行)한단 말입니까? 반드시 전하에게 칼날을 향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그 무리가 범죄(犯罪)한 것이 몹시 무겁고 죄악을 용서하기 어려워서 스스로 그 반드시 천지 사이에 용납되지 못할 줄을 알고서 이런 폐일(吠日)346) ·석천(射天)347) 의 계획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대개 옛날의 명왕(明王)이 한 사람을 처형함으로 해서 천하가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상줌으로 해서 만백성이 권장된다고 하는 것은 그 법과 형벌을 밝게 바로잡았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그 죄명을 밝게 바로잡지 않는다면 비록 적종(賊種)을 쓸어다 다 죽인다 하더라도 남아 있는 추악한 요얼(妖孼)들이 틈을 노려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 지금의 계획으로는 임오년의 흉역을 밝게 바로잡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주토(誅討)한다는 엄중한 글을 밝게 게시(揭示)하여 팔도에 효유(曉諭)하고 만백성에게 밝게 고하여 그들로 하여금 적당(賊黨)이 모두 죽었다는 것을 환히 알게 하되 무릇 그 때에 물들지 않은 자들은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는 것에 대해 염려를 놓게끔 하여야만 바야흐로 한 세상의 사람을 진정시키고 미래의 화를 막을 것입니다.

진실로 다만 오늘의 정토만을 시행하고 지난 때의 죄악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비록 도둑[龍蛇]을 길들여 모두 적자(赤子)로 삼고 효경(梟獍)348) 을 변화시켜 큰 도량으로 모두 감싸주어 살게끔 하려고 하나 저들이 그 한 털끝만큼이라도 임오년 사이에 부범(負犯)한 자는 모두가 의구심을 품고서 장차 다시 스스로 편안할 계획을 도모하게 될 것이니, 무신년과 을해년의 변고가 장래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기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더욱 성명(聖明)께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실 바입니다.”

하였다.

처음에 정국(庭鞫)할 것을 명하고, 또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고 하교하기를,

“이응원(李應元)을 처음에 정국할 것을 명한 것은 차마 듣지 못할 망극(罔極)한 부도(不道)의 말이 다만 오늘날 국가의 악역(惡逆)이 될 뿐만 아니라 곧 우리 선대왕(先大王)과 선친(先親)의 극악한 대역(大逆)이니, 마땅히 친히 국문할 것이다.”

하고, 임금이 내사복(內司僕)에 나아가 이도현(李道顯)과 이응원을 국문하였으니, 이도현은 이응원의 아비이었다. 이도현 등에게 묻기를,

“너도 떳떳한 천성을 갖추었을 것인데 대체 무슨 심정으로 선대왕의 인산(因山)이 막 지나 대소 관민(大小官民)이 슬퍼하며 허둥거리는 때를 당하여 이 만고에도 없는 극도에 달한 흉악하고 망측한 부도의 상소를 지었으니, 예로부터 악역을 어떻게 한정을 지으랴마는 어찌 너와 같은 자가 있겠는가? 국가의 의도는 사실 차마 말할 수 없는 것과 차마 들을 수 없는 것과 차마 써놓을 수 없다는 것으로써 참지 못하고 너에게 자세히 캐어 묻는 것이다. 그런데 너는 향곡(鄕曲)의 비천(卑賤)한 사람으로서 효경(梟獍)의 창자를 겸하여 혼미해서 깨닫지 못하니, 그 정상을 캐어 보면 말할 수 없이 흉악한 짓이다. 너의 죄를 네가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다. 너의 지난날의 상소는 다만 국가의 악역일 뿐만 아니라 곧 선대왕의 악역이고, 또한 곧 경모궁(景慕宮)의 악역이며, 또한 곧 종사(宗社)의 악역이다. 너의 심장(心腸)은 원래 자세히 캐어 물을 일도 아니니 지만(遲晩)349) 하고 납초(納招)하라.”

하니, 이도현과 이응원이 공초(供招)를 바치면서 부도(不道)한 말을 꺼내었다. 좌의정 김상철(金尙喆) 등이 울면서 아뢰기를,

“신 등은 맹세코 이 적(賊)과는 함께 살 수가 없으니, 곧장 손으로 때려 죽이고 입으로 물어 뜯고 싶습니다.”

하고, 인하여 여러 신하와 국정(鞫庭)에 내려가 적의 머리를 내려치니, 시위(侍衛)하는 군졸도 또한 채찍으로 난타(亂打)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윽고 경폐(俓斃)350) 할 염려가 있으므로 곧 법에 적용할 것을 명하였는데, 이도현·이응원은 모두 대역 부도(大逆不道)한 것으로써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고 간련(干連)된 김약련(金若鍊) 등은 분등(分等)하여 작처(酌處)하였다. 임금이 국문에 참여한 여러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이도현과 이응원은 죽이는 것으로도 족하지 않으며, 이덕사(李德師)·이일화(李一和)·유한신(柳翰申)은 또 이들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이었다. 반드시 주장하여 작용(作用)351) 한 사람이 있을 것인데, 왕장(王章)에서 벗어난 자가 있었기 때문에 다만 차마 말할 수 없는 의리(義理)가 세상에 밝혀지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차마 들을 수 없는 흉악한 말들이 누차 위에 올라오게 되었으니, 나는 이것을 몹시 두렵게 여기는 것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이덕사가 차마 말할 수 없고 감히 제시(提示)할 수 없는 일을 내가 등극(登極)하는 처음에 차마 말을 한 것은 그 심장(心腸)을 추구(追究)하여 보면 실로 극도에 달한 흉악한 짓을 한 것이며, 이덕사의 무리와 성기(聲氣)가 관통(貫通)된 자는 곧 서유신(徐有臣)·박상갑(朴相甲)·이상준(李商駿) 세 사람이다. 내가 당초 이덕사를 신국(訊鞫)할 때에 일체 모두 잡아들여 국문할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또 용서하고 참아 왔던 것은 진실로 본사건에 대한 단서를 명확하게 잡을 수 없었던 것이고, 모두가 이 세신(勢臣)의 후예(後裔)이므로 경솔하게 잡아들여 국문하지 않았던 것이며, 한 번 국정(鞫庭)에 이르게 되면 산사람이 되느냐 죽어서 귀신이 되느냐가 이에 판가름나는 형편이라 흠휼(欽恤)352) 의 정사에 있어서 참작하고 상량(商量)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선 멈추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괴귀(怪鬼)의 무리가 겹쳐 나오고 악역이 뒤따라 일어나서 심지어는 영외(嶺外) 먼 곳에 유생(儒生) 이응원(李應元)의 부자(父子) 같은 자가 있게 되었으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전일(前日)의 처분이 사랑으로 보살펴 준 것에 지나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에 대략 요점만을 가지고 여러 신하가 입시(入侍)한 장전(帳殿)에서 유시(諭示)할 때에 미쳐 상세히 말하지 못하였다. 서유신은 바로 누구의 아들인가? 박상갑은 역시 명가(名家)의 후예이고 이상준은 또한 스스로 자못 문자(文字)를 안다고 하였으니, 그 무리들이 한 짓을 경 등이 어찌 능히 다 알겠는가? 오늘에서야 밝게 유시하겠다.

대저 본사건에 대해 말하자면 몹시 길므로, 다만 그 대강(大綱)만을 들어 말하겠으니, 경 등은 들어 보라. 내가 동궁(東宮)으로 있을 때에 서유신의 무리 몇 사람에게 대해 마음으로 자못 인용할 만한 재주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를 대우하는 것이 다른 궁관(宮官)과는 남달랐다. 하루는 이상준이 나에게 이르기를, ‘노성중(盧聖中)은 문장(文章)·학식(學識)과 뛰어난 명성이 있어서 현재의 제일 가는 인물입니다. 임오년 이후로 지금 13년에 이르도록 대조(大朝)에서 대소관직(大小官職)을 제수하였으나 늘 한 번도 응하지 않은 것은 그 의도하는 바가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에 비로소 신 등의 풍기(風氣)를 듣고는 환로(宦路)에 나와 포부(抱負)를 펴보려고 하였는데, 그 13년 동안 대조에서 사모(紗帽)를 쓰지 않은 자가 이제야 비로소 쓰고자 하니, 그 의도를 가히 알만합니다.’고 운운하였는데 이는 무슨 말이며 이 어찌 인신(人臣)으로서 입에서 발설할 일인가? 그 때에 내가 그 말을 듣고는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놀라게 되어 잠자코 한마디 말도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다른 까닭이 없다. 그가 말한 것을 옳다고 하면 내 도리에 과연 어떻게 되며, 그가 말한 것을 그르다고 하면 실은 먼저 누설(漏泄)시킬 염려가 있었기 때문에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던 것이다.

며칠 후에 서유신에게 노성중의 사람됨을 물으니, 서유신이 말하기를, ‘노성중은 참으로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였고, 또 박종갑(朴宗甲)에게 물으니, 역시 서유신과 같이 하니, 대답하는 것도 또한 같았다. 이덕사에 이르러서는 입대(入對)하던 때에 비록 일찍이 차마 할 수 없는 일로써 말하지는 않았으나, 세 사람과 친밀한 정상은 그 무리들이 어떻게 발명(發明)하겠는가? 대조(大朝)나 소조(小朝) 사이에서 인신(人臣)으로서 섬긴다는 것이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가? 대조에서 주장한 대의(大義)를 소조에서 그 견해(見解)를 달리하고 그 지키는 것을 달리하겠는가? 과연 달리한다면 내가 지금 세상에 사는 것이 마땅히 살아서는 안되는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의리(大義理)는 또한 전후에 걸쳐 누차 여러 신하에게 말을 하였으니, 이제 다시 효유(曉諭)하지 않겠다.

대개 이른바 ‘13년 동안 대조에서 사모(紗帽)를 쓰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소조에 나오기를 즐겁게 여긴다.’고 한다면, 내가 듣고서 그것을 기쁘게 여겨야 하겠는가? 그리고 그들이 도리에 있어서 스스로 대조에서는 벼슬하지 않다가 소조에 와서 벼슬하려고 한다는 것을 이에 순신(純臣)이라고 이를 수 있겠는가? 설령 이 소소한 관작(官爵)의 거취(去就)에 있어서 이와 같이 차이가 나더라도 내가 기쁘게 듣고 즐겨 따르려 하지 않는데, 더구나 이런 차마 말할 수 없고 차마 제기(提起)할 수 없는 일이겠는가? 이와 같은데도 그 무리들이 총애로 연결시킬 기화(奇貨)로 삼았으니, 이러한 흉심은 옛날에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나는 이응원의 무리를 오히려 이 외로운 새새끼나 썩은 쥐새끼로 풍성 학려(風聲鶴唳)353) 로 여기고 있다. 내가 의리(義理)의 전말(顚末)을 말하려고 하면, 마음이 먼저 막혀서 눈물이 따라 내리고, 오장(五臟)이 무너지며 목이 메이어 상세히 효유(曉諭)할 수가 없으며, 말하지 않으면 의리가 이처럼 더욱 어두워지게 되니, 장차 어찌 하여야 하겠는가? 무릇 이 의리는 이미 춘궁(春宮) 때 상소에서 모두 털어놓았니, 이제 다시 제기하여 나의 심회를 어지럽히지 않겠다. 불령한 흉화(凶禍)의 무리에 이르러서는 결단코 주벌(誅伐)하고 신문(訊問)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인데, 놓아 두고 묻지 않는다면 이는 나라의 법이 없는 것이 된다.”

하였는데, 대신이 뜰아래에 있어서는 미처 상세히 받들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저 몇 사람들을 그대로 둔다면 소굴(巢窟)을 장차 깨뜨리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진노(震怒)하였으므로 여러 신하가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한참 있다가 또 하교하기를,

“이제 비록 잡아다 국문하려고 하나 밤이 이미 깊었다.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대저 저 몇 사람들을 만약 다시 서울에 머물러 두게 한다면 법이 없다고 이를 것이다.”

하고, 임금이 사관(史官)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너희들은 상세히 기록하여, 그 무리들로 하여금 내가 지난 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하라.”

하였다.

【영인본】 44 책 610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역사-편사(編史)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註 315]임오년의 지극히 원통하였던 것 : 영조 38년 윤5월 정조의 생부인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창경궁 안 휘령전(徽寧殿)에서 폐서인(廢庶人) 되어 목궤(木櫃)에 유수(幽囚)된 지 8일 만에 훙서(薨逝)한 변고를 가리킴. 이때 영조는 나경언(羅景彦)의 세자에 대한 고변(告變)이 있은 뒤 세자를 폐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차마 발설하지 못하다가, 다른 비어(飛語)가 있게 되자 세자를 재촉하여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혼전인 휘령전에서 행례(行禮)를 마친 뒤 세자에게 자결하도록 하였는데, 세자가 목을 메어 자결하려 하자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가 이를 풀어놓았으므로, 이어 폐서인을 명하고 목궤(木櫃)에 유수(幽囚)한 지 8일 만에 훙서하였음. 임오년은 1762년 영조 38년.


















[註 333]투저(投杼) : 삼지 투저(三至投杼)의 준말로, 참소가 여러 번 이르면 끝내는 믿게 된다는 말. 《전국책(戰國策)》에 “옛날 증자(曾子)가 비(費) 땅에 살 때에 비 땅 사람으로 증자와 이름이 같은 자가 있었는데 그가 사람을 죽였으므로 어떤 사람이 증자의 어머니에게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소.” 하니, 증삼의 어머니는 “내 아들이 사람을 죽일 리 없소.” 하고 태연히 베만 짰다. 조금 뒤에 어떤 사람이 또 “증삼이 사람을 죽였소.” 하였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들은 체 하지 않고 베만 짜다가, 또 한 사람이 “증삼이 사람을 죽였소.” 하자, 그제서야 증자의 어머니도 두려워서 베짜던 북을 던지고 담을 넘어 달아났다.……” 하였음.















[註 348]효경(梟獍) : 효는 어미를 잡아 먹는 올빼미, 경은 아비를 잡아먹는 파경(破獍)이라는 짐승. 흉악하고 은혜를 저버리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임.





posted by 무이 sweetm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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