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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02 씨앗을 머금은 미소
2007.07.02 01:25 게으른 날의 독서

몇 년째 내 미니홈피며 메신져 대화명 등에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씨앗을 머금은 미소'라는 카피는

나희덕 시인이 쓴 '반 통의 물'이라는 산문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이다.

한동안 후배녀석에게 가있었던 책이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서,

반가운 마음에 책의 내용을 몇 단락 옮겨 적어 놓는다.



야생식물 전시회에 가서 화분에 심어진 둥굴레꽃, 참나리꽃, 매발톱꽃, 섬초롱꽃 등을 샀다. 꺾일까봐 조심조심 차에 싣고 돌아오는데, 남편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밭 쪽으로 차를 몰았다. 밭에 도착하자 그는 그 화분들을 내려놓고 밭 중간중간의 빈자리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집에서 키우려고 산 것을 왜 여기에 심겠다는 건지 나는 내심 못마땅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누구 보라고 여기에 심어요?"

"우리가 밭에 왔을 때 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여기 옥수수랑 콩이랑 심심할 때 바라보라고. 이 꽃들도 원래는 산과 들에 피어 있었을 거야."

나는 좀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포로처럼 전시회에 끌려와 있던 야생초 몇 뿌리를 흙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이삼만원을 축낸 것이 조금 억울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베란다 구석보다는 여기가 볕도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할 테니 그들의 보석금을 대신 내준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은 이제 자유다.

밭 가운데 심어진 섬초롱꽃, 참나리꽃, 매발톱꽃은 아주 오래 전부터 거기 그렇게 피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온통 초록빛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주황빛과 흰빛 - 그들은 자기에게 가장 어울리는 배경을 얻고는 더 환하고 싱그럽게 피어올랐다. 그제야 비로소 제 존재의 빛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듯했다.

그 꽃들이 제 빛을 다하고 초록의 일부로 돌아간 뒤에 밭은 다소 심심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채소의 꽃들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노란 쑥갓꽃과 연보랏빛 아욱꽃은 여느 화초 못지 않게 예뻤다. 줄기나 잎은 이미 쇠어서 먹기 어렵게 되었지만, 나는 그들을 뽑지 않고 그대로 남겨두었다. 나비와 벌들에게도, 나에게도 그 꽃들은 아직 피어 있어야 할 이유가 충분했던 것이다.

나는 꽃집에서 살 수 없는 그 꽃들을 이따금 몇 송이씩 가져다 꽃병에 꽂아두기로 했다. 왜 사람들은 쑥갓을 먹을 수 있는 이파리로만 생각할까. 아마도 자기에게 유용한 부분에만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전부로 생각하려는 성급함 때문일 것이다. 잎을 주는 채소든 열매를 주는 채소든 엄연히 피워내는 꽃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꽃이라고 보아주지 않는다. 그저 아름다움의 대용품으로 주문된 꽃, 잎과 뿌리와 열매와 절연된 채 파편으로 존재하는 꽃만을 꽃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억세진 가지와 질겨진 이파리 위에 피어난 아욱꽃에서 모든 소용이 다한 뒤에 찾아오는 하나의 절정을 보았다. 그것은 유아독존의 자기현시가 아니라 멀리서 희미하게 웃고 있는 어떤 미소에 가까웠다. 스스로를 흩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고 있는, 씨앗을 머금은 미소였다.

posted by 무이 sweetmui